평화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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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74주년

칠곡의 ‘숨겨진 영웅’을 되새김질하다

6.25전쟁 발발 74주년

벌써 74주년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 뼈아픈 일이 발발한 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6·25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켰지만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이들이 있다. 호국도시 칠곡의 ‘숨겨진 영웅’, 소년병과 지게부대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6·25 전쟁 당시 집합되어 있는 KSC 한국노무단 대원들 _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6·25 전쟁 당시 집합되어 있는 KSC 한국노무단 대원들
_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소년병≠학도병

학도병이라고도 불리는 학도의용군은 어느 정도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해 군번과 특정한 계급을 부여받지 않았던 그들은 의용병이었다. 특히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백의종군’한 가운데 혁혁한 전공까지 세우며 숱한 희생 속에서도 호국의 초석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분명 ‘어리다’는 점에 있어서는 소년병과 학도병이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1년에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서는, 6·25전쟁 참전 소년병을 병역의 의무가 없는 만 17세 이하 나이로 전쟁에 참여해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군에 편성돼 복무한 정규군이라 정의하고 있다. 학적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기간 동안 전·후방에서 근무하고 일정기간 복무를 완수했다면 소년병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국방부가 파악한 만 17세 이하 소년병은 참전자만 따져도 거의 3만여 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는데, 그 가운데 2,500여 명이 훨씬 넘는 소년병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다 숨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학도병에 비하면 그 수가 적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호국은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6·25전쟁 당시 신병 입대모습._ 국가기록원 제공

6·25전쟁 당시 신병 입대모습._ 국가기록원 제공

다부동전투에도 참전한 소년병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는 3년간 치러진 6·25전쟁의 수많은 전투들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구국의 3대 전투로 손꼽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 조국수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들 중 다부동전투에도 소년병은 오로지 호국을 위해, 어김없이 그곳에 있었다.
1950년 북한군은 기습적으로 남침한 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고, 이후 이들은 점차 남쪽으로 향하며 여러 도시를 차지했다. 같은 해 8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10대 소년들이 자원입대 등의 방식으로 군에 동원됐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과정에서 치러진 전투가 바로 다부동전투다. 여기서 국군과 유엔군 등은 북한군을 처단하며 승리를 거뒀고, 이는 향후 국군이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전투의 순간에 소년병도 함께하고 있었다. 소년병들은 대부분 소총수로 전쟁에 참여해 다양한 부대에서 활약했다고 알려졌다. 이 중 일부는 미군부대에 소속되기도 했고, 전투가 치러진 후 파손된 다리와 도로를 복구하는 임무 등을 하는 부대인 공병대에 배치되기도 했다.
병역의 의무가 없었던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전선에 뛰어든 소년병들의 당시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이들 소년병의 존재는 종전 후부터 지속적으로 회자돼 왔지만 지난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 존재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관 낙동강부근 고지에서 전사한 미 제2사단 병사를 한국인 노무자가 지게로 나르고 있다.(1950. 9. 20.) _ 전쟁기념관 오픈아카이브 제공

왜관 낙동강부근 고지에서 전사한 미 제2사단 병사를 한국인 노무자가 지게로 나르고 있다.(1950. 9. 20.) _ 전쟁기념관 오픈아카이브 제공

A특공대로 불리던 지게부대

소년병 참전이 시작됐던 때와 비슷한 6·25전쟁 초기,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거침없이 남하하자 병력과 물자가 절실히 필요해졌다. 이에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남한에 급히 인력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950년 7월, 대통령령으로 한국인 민간 수송단(Civilian Transportation Corps, CTC)이 처음 조직됐다. 이후 이 한국인 민간 수송단은 1951년 7월 제임스 밴 플리트 사령관의 지시로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 KSC)*으로 재편성됐다. 이들은 지게로 군수물자를 운반해 ‘지게부대’라고 불렸는데 이 지게가 외국인들 눈에 알파벳 대문자 ‘A’를 닮았다 하여 ‘A-frame Army(A특공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몸무게에 가까운 식량과 무기 등 군수물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멀게는 약 16㎞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으며, 전투진지와 참호 구축에도 큰 도움을 줬다. 또 전장에서 쓰러진 전사자의 시체나 부상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후송하는 역할도 도맡았다.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 보급로와 도로, 다리 등을 건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두에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전쟁에서 해낸 몫은 잘 훈련받은 군인의 몫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제임스 밴 플리트 사령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만일 한국노무단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해야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을 정도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한국노무단으로 근무한 민간인의 수는 무려 3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당연히 빗발치는 총알과 포화 속을 헤치며 수많은 사상자도 발생했다. 그리고 다부동전투, 그 승전 너머에는 한국노무단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이는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회고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백 장군은 다부동전투에서 보여준 그들의 헌신을 무척이나 높이 평가했다.

* 현재 공식명칭은 ‘미8군 지원단’

낙동강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1950년 8월, 철모는커녕 맨 등짝에 지게를 지고 탄약을 운반하는 노무자들 _ 국가기록원 제공

낙동강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1950년 8월, 철모는커녕 맨 등짝에 지게를 지고 탄약을 운반하는 노무자들 _ 국가기록원 제공

숨겨진 영웅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

“지게부대원은 국군의 수호천사를 자처했던 이름없는 영웅들입니다.”
지난해 6월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뜻깊은 제막식이 열렸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군수물자를 지게로 운반하며 국군을 지원했던 지게부대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비가 73년 만에 세워진 것이다. ‘다부동전투 지게부대원 추모비’는 6·25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가 1,200만 원의 사비를 들여 제작했다. 당시 그는 “다부동전투에서 보여준 지게부대의 헌신을 높이 평가했던 아버지 백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추모비 제작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군번도 없이 위험한 전장을 누비며 물자 보급, 부상자 및 전사자 후송 등 모든 병참 임무를 담당했던 그들은 다부동전투에서만 2,800여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지나 참전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칠곡 군민들은 조국을 지켜낸 지게부대의 숨은 희생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추모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다부동전투’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최대의 격전지였던 328고지가 마을 앞에 위치한 석적읍 망정1리는, 지난 2018년부터 8월 둘째 주 일요일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 작게나마 위령제를 지낸다. 328고지 쟁탈전을 펼친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1950년 8월 13일에서 15일 사이, 대규모 전사자가 발생했다 하여 이날을 즈음해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지난 2022년에는 328고지 입구부터 정상까지 지게부대가 다니던 2㎞의 길을 복원하고 지겟길 입구에 높이 3.2m, 폭 1.5m의 대형 지게 조형물을 자비로 제작해 지게부대의 숨은 희생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망정1리 지겟길

망정1리 지겟길

백선엽 장군비

백선엽 장군비

지게부대 기념비

지게부대 기념비

(1950년 8월 10일 쾌청)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린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1950. 8. 11. 전사한 ‘이우근’의 수첩 中-

갑자기 마을 부녀자들이 쥐어준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목숨을 걸고 산길을 오갔을 지게부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학도병은 물론 소년병, 지게부대 같은 숨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재조명하는 일에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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