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 살리고

칠곡愛만

곳곳에 울려펴지던 독립의 함성
칠곡의 독립유공자

강원형·장석영·장진홍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물결은 들불처럼 번져 같은 달 12일, 칠곡에도 예외없이 다다랐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서슴없이 앞장섰던 이들, 칠곡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자.

강원형 혜사정

강원형 혜사정

상소로 일본을 규탄한
강원형 (姜遠馨, 1862~1914)


출생지: 칠곡군 지천면 신리
훈격(연도): 독립장(1980)

명성황후 시해로 본격화된 항일투쟁

강원형은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 설치 후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펼쳤다. 1905년 3월 최익현(崔益鉉)·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 구속되자 일본군사령부에 공개적으로 항의서한을 보내 일본의 불법을 규탄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45일간 구속된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소식에 통분하여 13도 유생을 대표해 상소를 두 차례 올리며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을사늑약 파기, 을사5적 처단 요구, 시민들의 국권회복 궐기를 호소하다 1905년 11월 28일 경무청에 붙잡혀 4개월간 투옥생활을 보냈다. 국권 피탈 후 상경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1914년 객지인 서울에서 사망한다. 이후 1980년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를 기린 기념비와 추모관

그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지천면에 세웠던 강원형 애국지사 기념비가 자리를 옮겨 왜관읍 애국동산에 있으며 또 그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 지은 혜사정이 지천면 심천리에 있다.

장석영이 세운 녹동서당(당시 만서정)

장석영이 세운 녹동서당(당시 만서정)

영남유림의 투쟁을 이끈
장석영 (張錫英, 1851~1926)


출생지: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훈격(연도): 독립장(1980)

장석영

을사5적 처단을 상소하다

이명(異名, 본명 외 이름) 장석교(張碩敎). 장석영은 영남지방의 유림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있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과 더불어 5적을 참하라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고종에게 올렸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칠곡의 보상회장(報償會長)으로 추대돼 활약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해외 독립운동 기지와 이주 한인들의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했다.

독립청원서 초안 작성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1차 유림단 의거를 이끌며 청원문 초안을 작성하고 유림대표 137명 중 1인으로 서명했다. 1919년 성주 장날인 4월 2일 연합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8월 21일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귀향해 세운 만서정

1923년 외지 생활을 접고 각산마을로 돌아와 1926년 강학 장소인 녹동서당(당시 만서정)을 창건했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 독립장은 1980년 추서됐다. 한편, 지난 2023년 5월 18일 칠곡군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 필립 르포르(Philippe Lefort) 대사에게 장석영이 작성한 파리장서 초안이 담긴 서책을 전달하며 프랑스 도서관에 기증 의사를 밝힌 뒤 파리장서 외국어 번역문이 있으면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장진홍 묘소

장진홍 묘소

죽음을 불사한 항일
장진홍 (張鎭弘, 1895~1930)


출생지: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현 구미시)
훈격(연도): 독립장(1962)

장진홍

광복단에 가입하다

장진홍은 1916년 비밀독립운동 단체 광복단(光復團) 가입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국내, 북경을 오가며 항일 투쟁을 펼쳤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교포 청년 80여 명을 모집해 군사교육을 실시했고, 1919년 3·1운동 때는 일본의 잔학상을 조사하여 미국 군함 승무원 김상철(金相哲)에게 전달해 각국에 배부를 의뢰하기도 했다.

폭탄으로 결의한 독립

1925년 대구에서 이정기(李定基)·이원기(李源祺)·이원록(李源祿)·이원유(李源裕)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한 뒤, 1927년 3월 폭탄 전문가에게 제조 기술을 습득했다. 그 해 10월 18일 경북도청·경북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대구지점 네 곳의 폭파를 시도한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처음 폭탄이 터지고 은행원·일제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안동, 영천 등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은신하지만 1929년 2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은신처가 들통나 붙잡히게 된다.

석적읍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1930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 자결 순국했다.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의 묘소는 현재 석적읍 남율리 산7-2번지에 남아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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